벤자민 디즈레일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대인 중 한 명으로 영국 총리를 지냈으며 대영제국에서 가장 저명한 유대인 정치가였습니다. 여왕은 그를 백작으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디즈레일리는 자신을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운 유대인임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사랑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여왕은 그가 유대인으로서 왜 예수를 믿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중간에 있다고 그녀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나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빈 페이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믿는 것보다 더 유대적인 것은 없음을 설명하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2000년 동안 우리는 조금은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유대교 전통은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배척하고 배제했고,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들 또한 우리와 우리가 유대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오해합니다. 신자, 특히 유대인 신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루기 전에 먼저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실은 그것이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의 큰 혼합입니다. 아쉬케나지와 스파라딕 유대인, 무신론자와 초정통파… 유대인이 누구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모두 다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를 찾고 있다면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유대인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조상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민족 또는 국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관습과 전통 유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1-3
그래서 유대인이 되는 한 가지 측면은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의 계획에서 불가분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출애굽 이야기,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땅에 대한 예언이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이루어진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민족들이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대표자로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들과 구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빛이 되어 열방에 하나님과 그의 길을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오늘날의 유대교는 하나님의 길과 그의 메시아를 거부합니다.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그들과 거리를 두며 그들과의 연결을 원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대사가 되고 열방의 빛이 되는 것의 반대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성으로서 실패한 곳에서 메시아는 성공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메시아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인 대표자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세계 만국에 드러내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20억 명이 넘는 이방인들이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6)
역사는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디즈레일리처럼 항상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맨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없었고 유대인들만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거의 모든 최초의 신자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의 큰 질문은 이방인도 유대인의 메시아를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고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메시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또 본보기가 되기 위해 오신 것임을 유대 제자들이 깨닫기는 쉽지 않았습니다.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 그의 씨로부터 축복이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임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3)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오신 유대인의 메시아이셨지만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한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더 선호하는 메시아를 믿는 것은 인종 차별적인 신을 믿는 것입니다.
랍비 유대교의 발전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모두 신약이 유대인들의 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유대교처럼 그 때의 유대교는 오늘날의 유대교가 전혀 아닙니다. 둘 다 "유대교"라고 불리지만 공통점이 별로 없습니다.
랍비 문학에 대한 세계 전문가인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아비가도르 쉰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신학은 구약성경의 신학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르는 전통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랍비의 전통입니다. 안식일 법, 음식법 준수 등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없습니다. 회당, 의례적 축복, 성인식 관련 특정 기도 또는 기도할 때 덮는 숄이 없습니다. 유대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무엇이든 그 출처를 확인해 보면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랍비 문학에서 온 것입니다. 거기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입니다.성경에 유대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유대인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다윗도 아닙니다. 오직 '유대인 모르드개'가 나오는데 그는 페르시아 유배 기간 동안의 구약 말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는 어떻게 한편으로는 성경적 기원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메시아닉 유대인을 거부하게 되었을까요? 서기 132년에 시몬 바르 코크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유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 중에 당대 종교 지도자였던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가 야만적인 잔인함으로 유명한 전쟁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아로 선언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 신자들은 로마에 대한 반란을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을 지키며 위해 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랍비 아키바가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선언하자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지지를 철회해야 했습니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그래서 랍비 아키바와 산헤드린은 메시아닉 유대인을 유대교에서 배제하기 위한 긴 법률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과의 어떤 접촉도 금지했습니다.
가장 큰 타격은 산헤드린이 회당에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18가지 축복 기도문에 메시아닉 신자를 저주하는 문구를 추가함으로써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을 때였습니다.
“사실은 저주인 이 축복 문구는 모든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도 회당에서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함께 기도하던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 기도 문구는 유대인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제거하고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1900년 동안 랍비 유대교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시도를 해도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유대인되심
랍비주의 유대교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유대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그 안에 진정한 유대교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00년 동안 그들은 우리(메시아닉 유대인)에 대해 유대인들을 세뇌시키려 했습니다.
랍비 아론 모스(Aaron Moss)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유대인은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채식주의자가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러나 랍비 모스의 말은 값싼 선전과 조작일 뿐입니다. 생각 해보세요.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절기를 지켰습니까?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 살았습니까? 바빌론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살았습니다!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된 유대인의 책으로 여기 이스라엘 땅에서 있었던 유대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가 보이시나요? 신약의 영웅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살았던 유대인이지만, 주로 바빌론에서 기록되었던 탈무드의 영웅인 랍비 아키바는 시스라의 후손으로 이방인 개종자였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절기는 예수님과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정체성을 지적합니다. 명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은 바티칸에서 열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킨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의 모든 요소는 이집트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는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요소들을 사용하여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천사로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가게 했던 것처럼 메시아의 피가 보호하고 속죄하며 구원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했던 대속죄일은 더 큰 구원, 곧 메시야의 속죄제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모든 절기는 메시아와 그의 통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유대인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오늘날 상황이 얼마나 복잡하고 도전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희의 견해로는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메시아닉 유대인 신자로서 우리의 유대성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문화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전절에서 팽이를 돌리고, 유월절에 무교병으로 만든 새알을 먹고 아피코만을 찾는다거나,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이유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주어진" 랍비의 구전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령하셨다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투 비쉬바트(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유대인 새해에 사과와 꿀을 먹고, 독립 기념일에 바베큐를 하는 것은 다 같은 이유로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음식에 맛을 더하는 조미료와 같이 유대-이스라엘 문화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유대 문화가 조미료와 같다면 모든 사람은 자신이 추가할 조미료의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적게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미료를 첨가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결은 조미료를 많이 좋아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양을 음식에 추가하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것을 먹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조미료”가 우리로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다른 신자들과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메시아가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려 오셨다면, 우리가 누구기에 그 문화적 장벽을 재건하여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메시아닉 유대인과 교회
그러나 정당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유대 메시아닉 믿음 운동에서 기독교 종교로 바뀌었고 유대적 뿌리에서부터 단절되었습니까? 초기에 일부 신자들, 특히 로마에 살았던 신자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화, 철학, 정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수단을 위해 거짓 교사들이 일어났고 성경을 왜곡한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에서도 우리는 그가 교회들에게 반복적으로 이것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봅니다. 기독교가 공식적인 종교로 등장한 것은 4세기 무렵이었고,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은 상당히 반유대주의적이었던 가톨릭 교회 아래 오랫동안 있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흐름이 항상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맏음이 혼자라고 느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응답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셨고 이스라엘에 믿음을 타협하지 않은 7000명이 아직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암흑기에도 일부 사람들은 문화의 흐름에 맞서서 예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랐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기독교의 평판을 떨어뜨렸습니다. 중세 이후에 변화는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한 종교개혁과 성경을 널리 접할 수 있는 인쇄기의 발명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영적 부흥이 시작되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적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개신교와 복음주의 등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수억 명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여러 교파의 신자들이 그들의 신앙의 유대적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지원해 준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어떻게 이스라엘이 재건되는 지를 목격했습니다. 사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관대한 도움으로 이스라엘 최초의 병원, 이스라엘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최초의 여학교 등을 설립했습니다. 메시아닉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은 모두 함께 예수님을 따르며, 이스라엘 민족이 늘 하도록 부름받았던 일, 즉 제사장의 왕국이 되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에 드러내는 특권을 가집니다. 역사상 다른 어떤 영적 지도자도 예수님만큼 많은 이방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인도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유대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
메시아닉 유대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둘로 나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기록한 남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롬 11:1-6)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메시아를 믿는 모든 이방인들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유대적 신앙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남아 있기 위해 회당에 갈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유대인이 되기 위해 랍비들과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마찬가지로,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충실한 시민으로 남아 있기 위해 우리나라의 모든 것에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평가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메시아닉 유대인으로서 우리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문화, 또는 우리의 정치적 견해에 근거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영적이며 하늘에 있는 메시아에게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이스라엘에 있는 믿는 자들로서 우리의 소명 중 하나는 우리 백성에게 빛이 되고 그들을 대신하여 “틈새에 서”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롬 10:1)
그러므로 생물학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가 유대인일지라도, 우리의 유대성은 유대인 메시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가족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모든 사람들이며 그들의 민족적 또는 유전적 배경이 무엇인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유대인인지 아닌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화적으로,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메시아닉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소수 그룹 중의 소수라는 것을 의미하며, 때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적으로 간주됩니다. 가정은 물론 외부로부터도 핍박을 가져오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때때로 당신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분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대표해야 하는 특권에 비추어 볼 때 희미해집니다.
제 이름은 에이탄이고 저는 메시아닉 유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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