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빛 달과 이란의 붉은 강 그리고 이사야 11장의 구원
- 원포이스라엘
- 4월 8일
- 5분 분량

이사야 11장은 다가올 구원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냅니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겪게 될 몇 가지 힘든 우여곡절도 보여줍니다.
세상은 어떻게든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중동이 극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력이 흥망성쇠하며 동맹이 뒤집히고 형성되면서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살아가기에 롤러코스터와 같은 때입니다. 배멀미를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우리의 눈은 지평선에 굳게 고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그 분이 우리의 닻이자 희망입니다.
이사야서와 같은 성경 예언은 다가올 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의 3분의 1이 예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을 손에 들고 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태연해지고, 성경의 경고와 지침을 우리 앞에 있는 비행기 좌석 주머니에 있는 비상 안내지처럼 취급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잠깐 훑어볼 수도 있지만 비행기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안내서를 붙잡고 그 내용을 다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피빛 달과 붉은 강
다소 불길하게도, 이스라엘의 이번 부림절에는 하늘에 큰 피빛 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월식은 "왕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임박한 몰락을 예고하는 징조였습니다. 민주적으로 새로운 왕을 선출할 희망이 없었던 폭군 시대에 붉은 달은 지도자의 시간이 다 되었다는 신호로 여겨졌습니다. 랍비 다비드 킴히(RaDaK로 알려짐, 1160–1235)는 선지서에 대한 그의 중세 주석에서 붉은 달은 사악한 자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조로 믿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일식과 월식과 같은 하늘의 징후는 매우 극적이며, 우리는 경이로움에 휩싸여 위를 올려다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의 일부일 수 있지만, 이러한 자연 현상이 반드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붉은 달이 그렇게 드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달이 피로 변하는 것은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욜 2:31)의 전조로 언급됩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분명 새로운 왕을 맞게 될 것입니다!
부림절 이야기는 기원전 5세기에 이란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 다른 구원의 이야기, 이란에서 또 다른 놀라운 반전을 이루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올해 부림절 직후에 우리는 또 다른 놀라운 자연 현상을 보았습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변이 충격적인 붉은색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한번 높은 산화철 함량으로 인해 발생한 자연 발생적 현상이었지만, 확실히 으스스해 보였습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이 피로 변한 출애굽기 이야기의 첫 번째 재앙을 연상시킵니다. 이러한 사건을 상기하면서 이란과 이스라엘과 중동 전체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이 성취되도록 기도합시다.
부림절의 구원이 놀라운 반전의 이야기인 것처럼, 멸망과 폭력의 이야기이지만 행복한 결말을 가진 것처럼, 유월절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아기들의 체계적인 대량 학살과 견딜 수 없는 억압과 노예 제도로 시작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집트의 신들은 하나하나 공격을 받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이야기 중 하나에서, 하나님은 기적적인 구원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 상황은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역전됩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에서 우리는 이집트와 이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집에 합류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목격하는 것을 봅니다.

두 이야기 모두에서 이집트와 이란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성막과 성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여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 이야기도 비슷한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봅니다. 위험과 박해로 가득한 남자아기들의 대량 학살로 시작하고 겉보기에 절망적인 상황이 대적의 멸망으로 바뀌고 그 결과 큰 기쁨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제시되는 반복적 패턴이며, 메시아 시대를 여는 궁극적 구원이 그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의 약속
다음은 다가올 선함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찬 위대한 구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마침내 어린아이들은 완전히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이번에 하마스 납치로 희생된) 비바스 가정 아이들의 히브리어 이름인 크피르와 아리엘을 발견했는데, 이는 사자 새끼와 하나님의 사자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전쟁 공포의 황폐함 속에서, 이 구절은 예수님이 돌아오실 때 또 다른 현실이 올 것이라는 희망과 위안을 가져다줍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것은 바로 앞의 장이고, 이것은 이상적 상태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사야 10장은 주로 이스라엘의 적들을 향한 심판과 분노로 가득 찬 장입니다. 그런 다음 이사야 11장은 구원의 약속과 메시아의 소개로 시작됩니다. 이 두 장 모두 이미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이것이 패턴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싹"을 즉시 다윗의 아들, 이새의 아들인 예수님으로 식별합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이 모두 첫 번째 오심에 대한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메시아 예언에서 여러분은 같은 구절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오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육신을 보는 경향이 있고 유대인들은 위대한 결말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둘 다 거기에 있습니다.
4-5절을 읽을 때 우리는 실제로 세상의 마지막에 예수님이 온 땅의 왕으로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이번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 그림은 요한 계시록 19장과 일치합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1-13).
이사야 11장의 메시아는 이제 권세로 통치하시고 악한 자들을 죽이시고 있습니다. 그는 땅을 치며 그 주민들을 심판하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심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는 의로우시고 신실하시며 참되시지만, 그는 일들을 행하시며 그의 옷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누구의 피 일까요? 이번에는 그의 피가 아닙니다. 그는 공평와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그의 적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1장의 에덴과 같은 비전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구속은 적들로부터의 구출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부림절의 이야기는 유월절의 이야기와 유사하며 반복됩니다. 이사야 11장에 묘사된 궁극적인 구원은 -즉 히브리어로 "게울라"로 알려진- 유월절과 부림절과 같은 과거 시대에 나타난 구원과 비슷할 것이지만, 더 큰 차원에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갈보리에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예고한 유월절 사건이 부림절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와 하만과 함께 한 잔치와 하만이 교수대에 오르는 선고가 유월절 첫날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사 랍비 케네스 브랜더는 그렇게 지적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오늘날 이스라엘이 처한 것과 같은 실존적 전투의 일부이기 때문에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사탄의 전쟁입니다. 선과 악의 싸움이며, 결국 누가 이길지 우리는 압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14-16).
아말렉은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을 파괴하려 했고, 나중에 사울 왕은 에스더 시대보다 수 세기 전에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고, 그 결과 아말렉 왕의 후손인 사악한 하만이 페르시아 궁전에 서서 동일한 대량 학살 의도를 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영이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반대하여 활동하지만, 메시아는 궁극적으로 그분의 모든 적을 물리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표징
출애굽기 17:16에 "여호와의 보좌" [כס יה]라는 어휘의 히브리어 단어들은 모두 관습에 어긋나게 글자의 절반이 빠진 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말렉의 이름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그분의 이름은 완전하지 않을 것이고 그분의 보좌는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없어질 때, 신성한 이름이 완전해지고 보좌가 완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9편을 언급하는 것인데 이 강력한 저주의 시편는 이스라엘 대적들의 최후의 종말과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의 보좌를 차지하시는 것을 묘사합니다.
주께서 영적 영역과 자연적 영역에서 그의 적들을 철저히 물리치셨을 때, 평화의 왕,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 그의 자리를 취하실 것입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깃발을 높이 들고, 표징처럼 서실 것이며, 그는 당신의 왕좌에 앉으시며 정의로 통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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