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41).
누가복음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이야기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암시를 파악하는 것은 누가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따라서 리브가의 임신 이야기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에서 쌍둥이가 "뛰놀다"는 것과 같은 단어를 누가가 선택한 것은 우연일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유사성 및 이 특정 단어가 칠십인역의 다른 곳에서 드물게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단어의 사용이 의도적임은 더욱 그럴듯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암시는 세례 요한과 그의 사촌 동생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의 구속적 중요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지상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전개되는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음을 표시합니다. 게다가 에서와 야곱에 대한 암시는 어린 아이가 큰 아이보다 훨씬 더 위대할 것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며, 따라서 큰 아이가 실제로 어린 아이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창 25:23; 눅 3:16 참조).
그러나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뛰었다"는 특정 그리스어 단어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단어(התרוצץ 히트로쩨쯔)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반면, 이 단어의 그리스어 번역은 다른 맥락에서 "춤추다" 또는 "기쁨으로 뛰다"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렘 27:11; 시 114:4; 6 참조). 따라서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권력 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요한이 어린 사촌이지만 더 큰 자를 경배하는 데 큰 기쁨을 느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현대적 맥락에서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비인격적인 태아는 기쁨으로 춤추지 않습니다. 실제 아기는 춤을 춥니다. 요한은 이미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도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춤추는 태아에 대한 누가의 묘사는 이 (사촌) 태아의 존엄, 운명, 가치에 대한 요한의 깊은 존경심을 보여줍니다. 오, 우리 세대가 태아를 생명이 없고 비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우 중요한 존재으로 언급하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임산부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집을 찬양과 경배의 소리로 가득 채워서 여러분의 태아가 태어나지 않은 세례 요한처럼 이미 예수님 앞에서 기쁨으로 뛰고 춤추기 시작하도록 하세요!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139: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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