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OFI KR GOLD.png

용서 - 메시아닉 유대인의 관점에서

최종 수정일: 2024년 7월 12일

의심할 여지 없이 용서하는 것은 인류에게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용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에서 믿음의 기둥 중 하나입니다. 하물며"다른 뺨도 돌려대며"라는 명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용서는 하나님을 따르려는 모든 이들의 삶과 성품에서 주요 특성들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명령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을 때, 그는 세 개의 구절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2-15).


“용서하다”라는 단어가 이 세 구절에서 여섯 번 나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는 복음의 핵심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진정한 용서란 무엇일까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복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복수는 용서의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8-39).


예수님은 복수와 대조되는 용서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복수를 추구하는 것은 분노와 원망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첫째, 그것은 우리의 관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에도 해로운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원망은 우리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렌 투생 박사와 그랜트 쉴즈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용서하지 않는 것은 면역 체계, 혈압, 심장의 신체적 건강과 웰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둘째, 복수는 다른 사람을 해치고 끝없는 복수의 순환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용서는 우리를 이 악순환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복수를 맹세한 원수를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8).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 복수의 경계를 정하며 처음으로 비례성의 원칙을 도입한 출애굽기 21장의 구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웃이 당신을 때려 이가 부러졌다면 칼로 찔러서 복수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로 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복수의 경계를 정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시켜 가해진 피해에 대해 보복이 비례하도록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도덕 원칙, 은혜의 원칙, 연민, 용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타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허락하였거니와… (마 19:8)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3)


모세가 경계와 제한을 정했다면, 예수님은 그 기준을 다시 하나님의 궁극적인 도덕 원칙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시작하기보다는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은 범죄 행위 자체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에 유의하십시오.

다시 말해, 그분은 악에 맞서거나, 자신을 보호하거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 이웃이 실수로 당신의 개를 들이받았나요? 당신은 복수로 그의 개를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를 용서하면 됩니다.


다른 이웃이 당신의 양을 훔쳤나요? 그의 아들을 찔러서 복수하지 말고, 경찰에 가서 처리하게 하십시오.


나중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7-19).


율법과 정의는 선하고 귀중하지만, 원수를 갚는 것은 결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누군가의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을 써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한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행위입니다. 제2성전 시대에는 특히 로마 경비병들이 이를 사용했는데, 로마 경비병이 (정당하든 아니든) 일반 시민을 때리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인에게서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로 분노를 야기하여 되받아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악 그 자체가 아니라 악행을 저지른 자, 즉 로마 경비병에 대항하여 그를 반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반항자와 그의 가족, 때로는 온 마을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믿는 자로서 평화와 용서가 목표일 때 우리는 불의를 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심지어 신체적 피해를 입거나, 재산을 잃거나, 학대를 견뎌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견뎌내신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은혜와 평화를 받을 수 있도록 불의를 참으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경찰관이 당신을 때리고 모욕하면 그를 법정에 세워야지 반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몇 장 뒤인 18장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인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예수님은 78번째가 되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 4:24에 근거하여 무한하고 완벽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상징적인 숫자 7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듭거듭 용서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거듭거듭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3-35).


엄청난 빚을 진 어떤 사람이 왕 앞에 끌려갔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그 빚은 분명히 그 사람이 갚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과 소유물을 팔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빚을 부인하지 않고 왕에게 갚을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7).


왕은 그의 빚을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용서의 세 가지 요소에 유의하세요.

  1. 긍휼을 베푸는 것

  2. 풀어주는 것

  3. 사면하는 것

예를 들어, 친구의 차를 빌렸다가 실수로 부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친구가 나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나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 사건으로 우리 관계가 상처받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차에 생긴 손해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돈을 빚지고 있습니다. 


친구가 나의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은 그가 직접 수리를 하고 비용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수리 비용이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친구가 내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그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내가 갚아야 할 빚을 갚은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가 지금이나 미래에 나에게 원한을 품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다시 내게 차를 빌려줄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친구는 그저 긍휼을 베풀면서 내 실수를 용서해 주었을 수 있지만, 내게 비용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내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나와의 모든 소통을 끊기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 실수를 용서해 주고, 심지어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앞으로는 차를 빌려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좋은 친구여서 내게 긍휼을 베풀고, 용서해 주고, 빚을 탕감해 주면서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대신 지불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차를 빌려 주기로 동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되고 완벽한 용서입니다. 이 친구는 너무나 좋아서 사실이 아닐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이고,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용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예를 들어, 그분의 창조물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면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지게 되고, 이 빚은 결코 우리가 갚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고 우리는 그분과 멀어지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우리가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동물을 제사로 바쳤고, 이 제사가 다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이 제사는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속죄하거나 덮어주었습니다.


메시아는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셨고, 그의 피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빚을 갚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메시아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의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28-30).


얼마 전 용서를 받았는데 지금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희극적일까요.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우리 모두 용서는 받고 싶어하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데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습니다.


정의는 무엇인가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어 당신을 해칠 때, 당신은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유치원 교사가 과실로 어린아이를 죽인 사건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그 교사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구합니다. 왜요? 그러면 그녀의 아이가 돌아올 것이기 때문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상한 만족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사람이 벌을 받고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어 당신을 해칠 때, 당신은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을 당신의 삶에서 지우며 복수하고 그 사람도 고통을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충분히 고통을 받았을 때, 당신은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악마가 당신이 선택하기를 바라는 대응입니다.


대안은 무엇일까요? 대안은 예수님입니다. 당신도 많은 것을 용서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당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 대신 대가를 치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증오와 복수심의 감정을 물리치기로 결정하며, 그 사람이 당신에게 한 일에 대해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당신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부정적인 감정을 용서로 대체하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합니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캐런 슈워츠 박사는 진정한 용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부정적인 감정을 버리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적극적인 과정입니다" – 캐런 슈워츠 박사


용서는 전혀 쉽지 않으며 종종 반문화적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용서는 인류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용서는 의식적인 결정입니다. 먼저 마음속으로 용서하기로 선택한 다음 나중에 마음의 감정이 따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어려운 것입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주의 깊고 고의적인 결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 11:25).


우리는 우리가 편하고 무언가를 얻게될 때 용서하고 싶은 소수의 사람을 정하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만을 용서하기로 결정한다면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한 일을 우리에게 하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방식처럼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잠깐, 그렇게 공평하게 들리지는 않지요? 왜 내가 대가를 치르고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왜 그렇지요? 그것은 용서가 아프고 값비싼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을 때 그 대가는 메시아의 생명이었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용서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 당신은 스스로 그 대가를 치르기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용서의 결과는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비워질 뿐만 아니라,분노, 적의, 증오의 사슬에서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은 사람에게 회개의 길을 열어줍니다.

용서는 관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당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당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당신에게 빚진 빚에서 풀어주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면하고, 지금과 미래에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미래에 그에게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2-25).

용서는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인데, 그것은 용서가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용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정당화의 전문가입니다. "나? 물론 용서받을 만하지!"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 그는 도둑이야!", "누구, 그 사람? 그는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들키면, 우리는 잘 변명합니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그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야. 그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을 뿐이야."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문맥과 주변 환경을 통해 갑자기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와 도둑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예외 없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얕보는 것을 멈추며 우리도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 우리도 엄청난 빚을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완벽하게 용서할 수 없다면 "지옥에 보내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칩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우리가 너무나 많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실상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 많은 인류와 자신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 사람이 복음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관용이나 불의를 허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사회, 정부, 당국이 있는데 그들의 임무는 법과 정의를 이루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용서를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용서 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복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깨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미국에서 흑인 미국인에 대한 인종 차별에 맞서 싸웠고, 1964년에는 미국에서 인종 차별에 맞선 비폭력 시위를 이끈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목사이기도 했던 킹 박사는 종종 신약성경을 설교했습니다.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외에도 그는 왜 복수하는 방식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차별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눈에는 눈이라는 옛 법은 모든 사람을 장님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를 얻기보다는 굴욕감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변화보다는 소멸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도덕적입니다. 폭력은 사랑보다는 증오에 기반하기 때문에 비도덕적입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형제애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사회를 대화보다는 독백으로 만듭니다. 폭력은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끝납니다. 그것은 생존자들에게 비통함을, 파괴자들에게 잔인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


킹 박사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적용했습니다. 복수는 복수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네덜란드 여성인 코리 텐 붐은 홀로코스트 동안 언니의 도움으로 많은 유대인을 숨겼습니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로 붙들려 갔고, 언니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코리는 전쟁 직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강의를 하던 중 수용소의 나치 경비병 중 한 명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전 나치 경비병은 부끄러워하며 그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코리는 처음에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가득 찼다고 인정했지만, 즉시 용서하고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그 감정을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초자연적인 사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코리가 복음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에 대해 몰랐다면, 그녀는 아마 전 나치 경비원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도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과 동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받아 마땅한 형벌도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용서하셨는지 이해하게 되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메시아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요.


그분은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셨을까요?


온 마음으로, 끝까지, 모든 것을 위해,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이제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자유롭게 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나요?




Comments


man%2520standing%2520under%2520orange%25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최고의 방법

THE BEST WAY TO BLESS ISRAEL IS WITH JESUS

원포이스라엘의 모든 사역이 여러분들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OFI logo2.png

Tel : +972-9-8611013

David Pinkas St 47, Netanya, ISRAEL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 화이트 유튜브 아이콘
  • Instagra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