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 이유 없는 미움을 당할 준비를 하세요
- 원포이스라엘
- 2024년 8월 22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8월 23일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격려하십니다: "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다시 말해, 이것은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끊임없이 중상모략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거부당하고, 이유 없는 미움을 받고, 공격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길이 겁쟁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 좁은 길 사역은 혐오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습니다. 쉽고 잘 닦인 길을 잘못된 방향으로 선택하는 혐오자들.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는데 그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히브리 사상에서 "좁음"의 의미
시편을 읽어보면 넓은 장소나 널찍한 장소가 바람직하고 축복받는 반면 좁은 장소는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사상에서 "좁은"이라는 단어는 고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어에서 "좁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요. 그 어근은 צַר(짜르)인데 극심한 해협같은 곤경을 의미하는 메짜림(מְּצָרִים)이라는 단어와 히브리인의 고통과 억압의 땅인 이집트를 의미하는 미쯔라임(מִצְרָיִם)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대 달력에는 매년 여름 "야메이 베인 하메짜림"(ימי בין המצרים) 또는 "곤경의 기간"라는 3주 기간이 있는데, 이는 애가 1:3에 언급된 고난에 기반한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양쪽에 위험이 도사리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반직관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넓직한 공간을 선호하고 자유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분의 왕국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상반됩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기꺼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크고, 처음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가장 큰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좁은 문입니다.
인기 없는 의견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믿는다면, 진실과 도덕성의 척도는 그분의 손에 있고 다른 누구의 손에도 없습니다. 그분은 주권적으로 결정하시고 규칙을 정하십니다. 그분의 방식은 인기가 없을 수 있지만 진실하고 옳습니다. 그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그 문제에 대한 최종 판단입니다. 그분이 아브라함과 무조건적인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을 그분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며,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다면, 그것에 맞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이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그의 율법,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지속적으로,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종종 주변 환경에서 전투를 벌이는 소수자처럼 느낍니다. 압도적으로 수가 적고, 잊혀지고, 오해받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미움받고 있습니다. 그 길은 좁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난색을 표할 것입니다.
초기의 신자들은 스스로를 "그 길을 따르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시며 자신이 그 길을 구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캠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실 많은 곳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그분은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을 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넓게 열린 초대는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분을 통해 올 수 있지만, 아버지께 접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신자들에게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지를 묻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메시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갈 1:10).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가 그분의 종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람의 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에 붙들리게 되고, 바른 의사 결정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기 시작하고 결국 세상과 매우 유사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과 함께 그의 좁은 길을 걸어갈 때만이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선함을 드릴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칠까요?
토라에는 이런 원리가 있습니다. 더러움은 전염되지만 그 반대는 아닙니다. 레위기는 이 문제에 대한 법을 포괄적으로 제시합니다. 집에 곰팡이가 피든 피부에 나병이 생기든, 죽은 동물을 만졌든, 하나님께 죄를 지었든, 상황을 바로잡고 더러움이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깨끗함을 전가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학 2:11-13).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부정한 자”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은, 부정한 것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대신에, 그들을 치유하고 온전하게 해주신 거룩하신 분이 극복하였습니다. 이 전에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눈먼 사람, 절름발이, 혈루증이 있는 여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니신 강력한 선함(신성함)은 너무나 강력해서 모든 것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분이 우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길을 떠나 잘못된 길로 갈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길을 따르는 자의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며 더 이상 예수님 스타일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좁은 길을 고수해야 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것입니다.
이유 없는 미움을 받음
예수님은 종종 친절하고 평화로운 히피족 유형의 인물로 여겨지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분이 신랄하게 미움을 받았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놀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의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중요한 대화였습니다. 20절에서 그는 수년 전, 바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의 이전 가르침을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15:20).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이것을 말했던 것을 기억하라... 그가 처음으로 그

말씀을 한 때는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바알스불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탄과 한패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실과 정반대였습니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미움을 받고 거짓으로 고발당하는 것이 단순이 가족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도 미워하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23, 25).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문제는 성경에서 몇 번 나오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구절은 시편 69편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4).
이 시편을 쓴 다윗은 그 느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고 쫓겨다녔습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조차도 아무 이유 없이 그를 계속 괴롭히는 듯했고, 그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였나이까?”라고 되묻게 되었습니다(삼상 17:29). 그는 오만하고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받았습니다. 사실 그는 방금 점심을 가져다 주었고 이스라엘을 거구의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게서 구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나중에 사울 왕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질투심 외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좁고 어려운 길을 따랐을 때 그의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왔는지 보십시오!
근거 없는 증오에 대한 해독제
다윗 왕은 미움을 받았고, 예수님도 미움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끊임없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이 민족에 합류하는 사람을 미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머리카락 수를 언급하시면서 다윗의 시편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8-31).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두 번째 성전은 근거 없는 증오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성전은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증오는 너무나 파괴적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증오보다 더 강력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이해하셨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신을 깊이 사랑하시고, 자신이 멸망할 수 없으며 영광스럽게 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곤경에 처한 사람은 그분이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위협으로 보는 대신,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고문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연민을 갖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당신 생각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사는 예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루마니아의 메시아닉 유대인 목사인 리차드 웜브란트는 그의 나라가 공산주의 통치에 들어갔을 때 법을 어기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했고 좁은 길의 대가를 배웠습니다. 감옥에서 매일 고문을 당하면서, 그와 그의 친구들은 고문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고문자들 중 일부는 그러한 초자연적인 사랑의 힘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용감한 사랑은 죄와 죽음의 틀을 깨뜨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근거 없는 증오를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십니다. 넓은 길이 결국 어디로 이끌고, 좁은 길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이끌 것인지 아는 데서 나오는 용감한 사랑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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