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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포이스라엘 블로그&아티클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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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의 지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들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분께 감사할지어다!…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편 107:1-2, 8, 12-13, 43). 지혜 문학’이라는 용어는 히브리 성경의 특정 문헌 장르(예: 잠언, 욥기, 전도서)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이 명칭은 성경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하려는 ‘지혜 문학’입니다(딤후 3:15). 성경이 그러한 지혜를 전달하는 한 가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실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시 19:1, 7, 14). 아내가 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제 마음을 전해보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문득, 더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다는 제 바람을 분명하게 말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그러다 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이제 제가 말한 것을 실천할 때가 됐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프로포즈했고 심지어 제 의도를 증명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이것은 아내 문화의 관습입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매우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도대체 교회가 왜 필요한가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2-23). 도대체 누가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계속해서 나아가기를 원하는 신자들”일 것입니다. ‘많은 환난’에 관한 바울의 언급(22절)과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23절) 사이에는 분명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지역 교회 내에 지도자를 세우는 일은 각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주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영적 여정에서 '많은 환난'을 마주해야 하는 모든 신자에게 영적인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이유로 우리를 미워하고, 결혼 생활이나 재정 문제로 완전히 압도당할 때, 우리는 기독교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거나 페이스북 그룹에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어느


벌떡 일어나세요!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행 14:10). 바울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명령한 것에 대한 에카르트 슈나벨(신약학자)의 말은 정말로 오늘 아침 설교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10절: "그는 그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지탱하지 않고는 그는 한 번도 그의 발로 일어서지 않았습니다."(존더반 신학주석606) 복음이 있는 설교와 복음이 없는 설교는 어떤 면에서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 둘 다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명령합니다(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두 종류를 설교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정말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오직 복음 중심의 설교만이 실제로 영적으로 저는 사람들을 뛰게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


일어서서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부르심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83:2-4, 16-18). 시편에 수록된 아삽의 마지막 시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 선지자이자 시인은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고 자부하는 모든 교회가 가르쳐야 할 신학적 진리를 강조합니다.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의 사주를 받은 적대적 국가들의 연합체는(시편 82편 참조)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완전히 지워버리려 합니다(4절). 그러나 아삽은 이


가까이 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 (시 76:1-2, 8-9). 이전 시편(시편 75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식되는 신적 1인칭 화자와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닌 1인칭 화자 사이의 신비로운 혼재를 발견했습니다. 시편 76편에 이르러 그 신비는 더욱 깊어집니다. 다만 이번에는 신적 정체성에 관한 신비가 아니라 신적 임재(즉, 거처)에 관한 신비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 시편을 면밀히 읽어보면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하나님은 정확히 어디에 계시는가? 1-7절에서 하나님은 살렘, 곧 시온 산에 거하시며 그곳에서 열방을 통치하십니다. 그러나 예고 없이 8-12절에 이르면 하나님의 거처는 시온에서 하늘로


고난받는 종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 18:0, 4-6). 오늘날의 유대교에서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고통을 당하거나 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고 세계 평화를 이루는 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슬프게도 고난 받는 종이자 다윗의 왕이신 메시아의 형상은 그들이 시편을 펼칠 때마다 그들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습니다. 승리의 노래인 이


예언적 확실성으로 보기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수 24:19-20). 이 책의 마지막에서 여호수아는 군사 지도자의 역할에서 물러나 선지자의 모자를 씁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는 것을 봅니다. 반전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저자는 여호수아서를 왜 이렇게 우울한 분위기로 끝맺을까요? 여호수아 24장의 기능은 여호수아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제시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토라의 결론에서 모세와 직접적으로 병행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도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았고(신 31:28과 수 24:1을 비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


우리가 기다리는 초막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3-4a, 16). 며칠 전, 제게 매우 가슴 아픈 생각이 스쳤습니다. 우리 달력에서 가장 기쁜 명절인 초막절(수콧)이, 3년 전인 2023년 초막절 마지막 날(10월 7일) 유대 민족에게 자행된 끔찍한 만행의 기억으로 인해 영원히 얼룩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비극적이게도 그날은 전 세계에서 유대인 혐오를 기념하는 날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슥 12:9 참조). 하지만 이내 훨씬 더 큰 위로가 되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초막절의 고통은 언젠가 다가올 초막절의 기쁨에 완전히 삼켜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메시아 왕국에서 모든 민족이 해마다 예루살렘


절기가 완성되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1).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절기들(초하루와 안식일을 포함한)을 메시아를 가리키는 "그림자"라고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즉 시내산 언약의 규례와 법규, 그리고 예배 제도—을 메시아적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로 묘사합니다(히 8:5; 10:1). 신약성경의 이러한 메시아적 해석은 예수님과 초기 교회의 주요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절기 기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저자들이 성경의 달력을 어떻게 메시아적 그림자로 해석했는지는 그만큼 명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토라(모세오경)에 기록된 절기 관련 율법에는 모세가 그것들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상징으


다른이들의 친절로 하나님을 바라보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59:0, 8-10, 16-17). 시편 59편은 사울이 사람을 보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밤에 그의 집을 감시하다가 아침에 그가 깨어날 때 해치려 했던 사건을 회상합니다(삼상 19:11과 시 59:0 비교). 따라서 다윗이 저녁에 자신을 에워싼 원수들을 언급하는 것은


용서 그 이상
“내가 너를 뭇 나라 가운데에 흩으며 각 나라에 헤치고 너의 더러운 것을 네 가운데에서 멸하리라 네가 자신 때문에 나라들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22:15-16). 속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메시아닉 신자들은 대개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죄와 범죄과 불의의 용서만을 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속죄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내산 언약도 성막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제례적 부정함’의 문제를 강조합니다(특히 레위기 11-15장 참조). 제례적 부정함은 아담의 범죄가 초래한 결과들과 접촉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오염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따라서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부정함을 정결케 하는 일을 반드시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속 거하실 수 있고


회개의 날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겠다’고 주 여호와가 말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0-32). 이스라엘의 거룩한 절기 중 하나인 대속죄일이 다가옴에 따라,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지은 죄를 의도적으로 되돌아보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과 화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완전히 솔직해진다면, 잘못을 저지른 대상의 목록 맨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


당신의 마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1, 6, 8). 시편 82편은 “보이지 않는 영역”(마이클 하이저의 시편 82편에 관한 책 제목)을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복종해야 할 천상의 존재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상의 존재들로 이루어진 신들의 회의를 갖고 계시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특히 열왕기서의 한 구절은 눈에 띄는데, 이는 하나님의 회의의 실재를 확증할 뿐 아니라 세상에 만연한 미혹을 드러내어 줍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


배신을 아시는 메시야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 55:12-14, 20-21) 시편 55편은 원수에게서 구원해 달라는 시편 54편의 주제를 이어받지만, 매우 다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시편 54편 서문에 나오는 역사적 세부 사항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암울한 순간에도 요나단은 다윗과 서로 언약을 맺고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했습니다(삼상 23:16-1


신뢰를 배우는 영혼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1-2, 5-6,8) 시편 62편에는 여섯 구절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핵심 단어가 종종 눈에 띄지 않는데,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아흐(אך)”인데, 문맥에 따라 “확실히”, “오직”, “그러나”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 히브리어에서 “아흐”는 긍정을 강조하는 조사입니다(HOLOT 사전 참조


처음부터 약속된 승리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3-4, 10-11) 현대 독자들은 “의인”이 악인의 피에 발을 씻는다(10절)는 생생한 묘사에 종종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묘사는 히브리 성경의 좀더 넓은 종말론적 비전 안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적들을 묘사하기 위해 치명적인 뱀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시 58:4). 히브리 성경은 뱀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고대 갈등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창 3:15). 창세기 3:15의 직접적인 맥락에서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지만, 토라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뱀과 같은 적대자로,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 여호수아 2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데 전념하라고 촉구합니다. 놀랍지 않게도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책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밤낮으로 묵상하라고 촉구합니다(수 1:7-8). 여호수아서의 구성 전략에 대한 모세의 율법의 중요성은 이 거시구조적 인클루시오(프레임)를 통해 강조됩니다. 이 결론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는 것은 여호수아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를 임명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노인 여호수아가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의 삶을 모


힘든 시기에 드리는 찬양의 힘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0, 5, 7-11). 시편 52편부터 56편까지의 서문과 마찬가지로, 시편 57편의 서문은 이 시편이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치는 상황(삼상 22:1; 24:4 참조)에서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전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시
![[오늘의 묵상] 기쁨을 더함](https://static.wixstatic.com/media/5a19ee_baf7aaf6e8bd4e478cd8d15033c9813d~mv2.jpg/v1/fill/w_333,h_250,fp_0.50_0.50,lg_1,q_30,blur_30,enc_avif,quality_auto/5a19ee_baf7aaf6e8bd4e478cd8d15033c9813d~mv2.webp)
![[오늘의 묵상] 기쁨을 더함](https://static.wixstatic.com/media/5a19ee_baf7aaf6e8bd4e478cd8d15033c9813d~mv2.jpg/v1/fill/w_300,h_225,fp_0.50_0.50,q_90,enc_avif,quality_auto/5a19ee_baf7aaf6e8bd4e478cd8d15033c9813d~mv2.webp)
[오늘의 묵상] 기쁨을 더함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눅 15:6, 9, 24, 28a). 우리 모두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극심한 공황과 그것을 다시 찾았을 때의 예상치 못한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제 여동생 중 한 명은 사랑하는 고양이 조슈아를 잃어버렸다가 간절한 기도 끝에 다시 찾은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세 비유의 이야기 모두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있어야 할 기쁨입니다. 목자, 과부, 그리고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위해 누가 기뻐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신앙심 깊은 큰 아들입니다. 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광야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0-1, 3). 시편 63편의 서문에 따르면, 다윗은 유다 광야에서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프랑크-로타르 호스펠트는 여러 언어적, 주제적 유사점을 바탕으로 이 시편을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성막을 떠나 광야로 도망친 이야기(삼하 15:13-17, 23; 헤르메네이아, 123쪽)와 연결합니다. 익숙한 안락함을 갑자기 잃게 된 다윗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물리적인 광야에 내던져진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궁궐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단절된 것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물리적인 사막으로 도피해야 하는 상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으실 때에 즐거워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저주의 시편은 궁극적으로 악이 아닌 선을 낳습니다. 그러나 적의 몰락을 기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24장은 적에 대한 현명한 조언이 많이 있습니다. 29절은 복수에 대해 경고하고, 19-20절은 악한 자들이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독자에게 격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합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 24:17-18).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이 익사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미리암은 심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썼습니다(출애굽기 15장).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의 사사 중 한 명인 드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려는 원수들에게 승리를 거두게 하셨을 때 찬양의 노래를 썼습니다(사사기 5장). 하지만 이것을 확인해 보십시


경건한 우정의 선물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0-1, 3-4) 시편 54편의 서문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서 도망친 이야기(삼상 23:14-28)와 십 사람들에게 또 다시 배신당한 이야기(삼상 23:19; 26:1 참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애가에서 다윗은 낯선 자들과 폭력적인 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수색하며”(시 54:5)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고”라고 말한 사무엘상 23:15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낯선 자들과 폭력적인 자들은 아마도 사울이 택한 삼


거리감에서 임재로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시 42:0-2, 9). 시편 1권(시편 3-41편)에서 2권(시편 42-72편)으로의 전환은 시편 41:13의 마지막 송영뿐 아니라 서문에 묘사되는 저자의 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2권은 고라 자손이 지은 일곱 편의 시편으로 시작됩니다(시편 43편에는 서문이 없지만 시편 42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시편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 시편들은 의도적인 구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실 메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시편 42편부터 44편까지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노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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