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OFI KR GOLD.png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까요?

작성자 사진: 원포이스라엘원포이스라엘

하나님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실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은 감정을 상하게 하고 수용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이 명백한 편애에 당황해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특별히 한 민족에게 “애정을 가지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고 방식에 어떻게 맞춰야 할까요?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신 7:6-8)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때로는 율법을 따르는 것과 같은 조건으로, 때로는 그들이 모든 조건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다른 부드럽고 애정 어린 명칭 가운데서 그의 "특별한 보물"(סגולה 스굴라)과 "그의 눈동자"(בבת עיניו 바바트 에이나브)로 언급합니다. 그들이 상처를 입으면 그분의 화와 분노가 일어나며, 그들의 불성실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그분을 괴롭힙니다.

이 선택은 메시아 예수님의 안전한 오심으로 창 밖으로 던져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시며 바울은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 그다음에 이방인에게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에(롬 11:28-29) 우리는 계시록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의감과 페어 플레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 마음의 열정에 맞출 수 있을까요? 사실, 이것은 모든 민족에 대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과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그 분의 선언과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베드로는 사도행전 10:34에서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주님, 다른 민족을 선택할 수는 없으셨던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을 영예와 특권으로 생각하지만 무거운 책임도 수반합니다. 여러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대신에 대신 다른 종족 그룹을 선택하셨기를 원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암 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독특한 계시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더 높은 수준으로 부르셨습니다. 재판관이 범죄자들에게 “본보기”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 본보기가 되고 교훈이 됩니다. 실패할 경우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신명기의 저주와 형벌은 그 가혹함과 극단성에서 눈물나게 만듭니다.

시편 147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인 성경에 접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한 민족을 통해 당신의 메시아를 세상에 데려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들을 통한 인격적인 보내심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러한 선물을 세상에 전달하는 보관인, 수호자 및 전달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일 수 있지만 그들이 선택된 데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그 동기는 그 자체로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기는 땅 위의 모든 민족을 축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본보기인 '기수' 국가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 이야기의 우여곡절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떤 성품을 따르고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신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자비로운 사랑과 긍휼 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의 다른 연인들 때문에 거절당했을 때의 질투와 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원대한 계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위치를 헤아리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다루신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은 참으로 성경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역사를 뒤로 한 번 훑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특별한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멸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사탄적인 추진력은 대대로 지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선민 되기를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감사 

우리가 가진 문제의 일부는 단일성이 좋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더 이상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다고 썼지만(3:28), "남자나 여자"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게 될 때 우리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동등하게 귀중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정체성은 우리에게 특혜를 주거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남성 또는 여성으로 남아 있으며 성별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일부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존중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에서의 역할이나 기능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평등을 추구해 온 인류는 차이와 가치를 혼동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차이를 부인하고 우리가 다르다면 하나가 다른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실수입니다. 우리가 다를 수 있지만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대적이 숨기려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 전략이 삶의 많은 부분을 음흉하게 오염시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같아야 하고. 같은 것을 가져야 하며, 똑 같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요, 목적이나, 소망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 주변의 동식물군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양성이 함께 조화롭게 일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보아야 하며, 그것을 단조롭고 단색의 소리로 개성의 힌트를 없애버리는 공산주의 아파트 블록과 비교하기만 하면 됩니다.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는 독특하며, 우리를 위한 그분의 계획 또한 맞춤형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이라는 사고의 덫에 빠지면서 우리는 당연히 같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미래에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는 그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시지만 그의 고통스러운 최후에 대해 경고하기도 하십니다. 베드로는 즉시 요한을 바라보며…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 21:21-22)

예수님은 베드로와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거나 똑같이 해달라고 주장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과 또한 그분이 우리 앞에 유일무이하게 제시하신 도전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를 위한 그분의 길은 다릅니다. 비교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만, 메시아의 몸은 각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소명, 은사, 특권 및 책임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축하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즉 남이 가진 꾸러미를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계명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것에 만족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선택하신 것을 시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은혜롭게 기뻐하고 그들의 기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선하심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면 우리가 보는 차이점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특권은 잘 관대하게 관리하고 다른 사람들은 면함 받는 듯이 보이는 우리의 어려움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빠지는 탐욕과 쓰라림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부하시고 다른 사람은 선호하시며 다른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우리는 손해를 보고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거짓말입니다.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는 우리 각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는 우리 각자에 대한 다른 계획과 다른 관계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지혜로우신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도 덜 존중받는 일이 없음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태도를 포기하고 대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분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마음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절당했다거나 우리가 차선책이라는 거짓말, 또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은 당연히 주어져아한다는 거짓말을 믿지 말기를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오며 메시아 예수님의 용서를 얻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요함을 나누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 안으로 인도되었고, 선민에게 접붙여졌습니다. 에베소서 2:12-13은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계시록이 끝날 때까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롬 9-11, 렘 31:35-36).  우리가 성경과 메시아, 하나님의 이야기를 접함으로써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정하신 독특한 역할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그러나 오늘날 우리 눈앞에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고대 약속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행해지는 것을 보는 놀라운 특권을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전 세계에 흐릿하게 보이는 삽화와 같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이스라엘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씀하신 그것을 반드시 행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증거이며, 하나님 말씀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됨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을 계속해서 증거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Comentarios


man%2520standing%2520under%2520orange%25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최고의 방법

THE BEST WAY TO BLESS ISRAEL IS WITH JESUS

원포이스라엘의 모든 사역이 여러분들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OFI logo2.png

Tel : +972-9-8611013

David Pinkas St 47, Netanya, ISRAEL

COPYRIGHT © 2021 BY ONE FOR ISRAEL - ALL RIGHTS RESERVED
  • 화이트 유튜브 아이콘
  • Instagra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