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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과 나오미: 우리 시대를 위한 이야기

최근에 룻기를 읽으면서 시작 장면이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의 상황에 적절한 은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요 인물들의 히브리어 이름을 고려할 때 특히 그렇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나오미를 붙들고 있는 룻의 모습은 “이 시대의 영”에게 유혹을 받아 뒤로 물러나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의 서구 교회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의사 결정의 시간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은 선은 악하다 하고 악은 선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가 그 무엇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확신하는 우리는 너무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 속임수, 강한 유혹, 대규모의 타락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고, 사람들은 속임수에 빠져 기만 당합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 좋지 않은데 좋은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도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은 넘어지기 전에 옵니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속임수에 빠질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설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실수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이 마지막 때의 불법과 미혹의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견고한 기둥을 줍니다 - 그것은 우리로 멸망하게 되거나 구원을 얻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함이라.” (살후 2:10)


즉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멸망하고 반대로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기에서 룻과 나오미의 그림이 나옵니다.

어떤 면에서 나오미는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나오미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대표자라면 룻과 오르바는 그 유대인 가정에 초청받은 열방 민족들의 대표자로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나오미를 사랑했지만, 시련이 닥치고 나오미가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라고 결정했을 때 두 여성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둘 다 그녀를 사랑하고, 끌어안고, 존귀하게 대하며, 입 맞추었지만 룻은 그녀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어 이름들(성경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르바(ערף)의 어근은 목 뒤 또는 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곧은 자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시는 단어로, 돌이키다, 배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르바의 이름 끝에는 추가적인 알파벳 ה(아)이 있는데, 히브리어에서 이것이 단어에 붙을 때는 방향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몰(שמאל)"은 "왼쪽"을 의미하고 "스몰라(שמאלה)"는 "왼쪽으로"를 의미합니다. 집은 "베이트(בית)"인데 "하바이타(הביתה)"라고 하면 집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오르바가 영양을 의미하지만 "뒤돌아가는"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룻(רוּת)은 동료애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우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이 이야기와 비유에서 룻은 신뢰, 충성,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나오미(נׇעֳמִי)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지혜와 다른 길을 갈 때 그들은 결국 헤어지는 것으로 끝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중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에 자주 예언된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키는 문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그것이 옳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과연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결정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예언들을 재해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으로 다시 모인다는 약속이 아닌 다른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기다릴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성경의 놀라운 약속과 정보를 많이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계속해서 이루실 때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겔 47:22-23).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안다면 그가 모든 일을 잘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그분이 완전히 의로우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젠더와 성, 끔찍한 지옥의 실상과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 되심의 이슈들을 다룹니다... 이 모든 것들은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특히 이러한 이슈가 당신 개인에게 또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말입니다. 세상은 성경이 우리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되고 정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슬프게도 이에 동의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함께 거친 길을 가기에는 오르바처럼 그들이 알고 있는 생활과 문화를 그들은 너무나 좋아 합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을 거부하는 길을 따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믿을 만큼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일들은 상당히 두렵고 혼란스러워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아가시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 대신에 자신의 판단을 의존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이 언급하기 원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합니다.

꽉 잡으십시오!

그러나 룻은 깊은 관계를 통해 사랑하는 유대인 가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하는 것과 자신이 찾은 삶을 위해 기꺼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위험도 컸고 많은 것이 불분명했지만 예수님의 친구 마리아처럼 룻도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기만은 강력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지혜와 통찰력을 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때로는 꽤 긴 여정이지만, 그는 열심히 찾는 사람이 찾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당분간 거기 붙어 계십시오. 그가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 그가 분명히 알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소중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몇 가지 다른 예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없이는 감히 한 발짝도 내디딜려고 하지 않았고(출 33:15), 야곱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그가 축복을 받을 때까지 보내주기를 거부했습니다(창세 32:26). 솔로몬의 아가에서 신부(하나님의 사랑받는 우리를 나타냄)는 신랑에게 달라붙습니다. 룻처럼 수넴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 놓지 아니하였노라.” (아가 3:4)


오르바가 되지 말고 룻이 되십시오!


친구여, 꽉 붙잡고 놓지 마십시오. 길은 험난하지만 앞으로가 기대되는 큰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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