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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운데 거하십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건축하게 하라”(출 25:8).

하나님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생각은 고대 번역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어 번역가들은 "내가 그들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원래 히브리어의 명백한 의도를 피했습니다. 또한 아람어 번역가들도 "내가 거주할 것이다"(שכנתי 샤칸티)라는 동사를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신성한 임재"라는 명사로 바꾸었습니다(샤칸티에서 쉐키나( שכינה)로). 유대교의 쉐키나 개념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실제적이며 충만함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의 확장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신다고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을뿐만 아니라(출 25:8; 29:45; 민 5:3; 35:34; 왕상 6:13; 겔 43:9; 슥 2:14-15, 8:3) 토라는 실제로 여호와께서 친히 회막 안에서 모세를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레 1:1). 여기에 성막이 실제로 에덴 동산을 본따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추가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가운데 행하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 있게 합니다(창 3:8; 레 26:12; 신 23:15). 신약이 하나님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고 주장할 때(요 1:1, 14; 골 2:9), 그것은 잘못 이해한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갑자기 탄생한 일탈적이거나 우상 숭배적인 형태의 유대교를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마 1:23)이라는 믿음은 토라가 가르치는 것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토라의 가르침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온전한 인간이 되신 온전한 하나님은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신학과 완전히 일치하는 믿음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침내 재림하실 때 완전히 실현되어 이스라엘과 열방이 영원히 누리게 될 희망이기도 합니다! “또 그가 나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길 가운데로 나서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는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와 그 종들이 그 가운데 있으리로다 그를 섬기겠고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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