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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처럼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이 우정을 가장 감동스럽게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는 파라샤(토라 포션)의 “아케다트 이즈학 עקדת יצחק (이삭 묶기)”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특정한 산으로 가서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산에서 일어난 일은 역사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으며 아브라함은 친구이신 하나님의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을 공유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아!”하시며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히브리어로는 “히네니 הנני”인데 무조건적인 가용성의 표현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음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 표현은 명령의 표현이 아니라 요청이였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 명령을 연상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 친척의 땅,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명령이 아니라 요청을 하십니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종종 단어나 개념의 첫 번째 언급은 성경의 더 넓은 그림에서 그 의미를 여는 열쇠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의 개념이 먼저 나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기꺼이 희생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본문은 늙은 아브라함이 노인으로 하기 힘든 나무 쪼개고 이삭과 함께 하나님이 명하신 산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 아들은 쪼갠 나무를 등에 메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모리아 산은 예슈아께서 훗날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실 바로 그 곳입니다. 순진하게 이삭은 희생 제물에 대해 묻자 아버지는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유대 전통(라시)에 따르면, 이삭의 손과 발은 등 뒤로 묶여 있었고, 칼을 높이 든 아브라함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과 감정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으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고통은 거의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잠깐, 여기에서 또 다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 상태를 잘 알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브라함에게 진정으로 그의 믿음이 얼마나 준비되었고 기꺼이 순종할 마음이 있는지를 알게 하신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친구 아브라함을 그의 아들이 죽임 당할 곳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고통을 나누기를 원하셨던 의도가 있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의 친구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주실 괴로움을 아브라함에게 나누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위로와 공감과 사랑을 얻을 수 있었셨을까요?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마 바울이 빌립보서 3:10에서 “고난의 참예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도 이 이야기를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때로는 그분의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고 이끄십니다(요15:15).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생각을 당신과 나누실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생각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시는지 보여주시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그가 하고 싶은 일에 함께 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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