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 4:11).
친숙함은 경멸을 낳습니다. 그리고 요나서의 경우, 줄거리에 대한 친숙함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메시지로 우리를 완전히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미워하는 적을 사랑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급소를 찌르는 구절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도시가 수천 발의 미사일에 의해 폭격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가자 지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있는 아스글론 시의 메시아닉 유대인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 나라 도시들이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러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있는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신자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선거 기간 동안 북동부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있는 바이블 벨트의 보수적인 미국인이라고 당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나서는 당신이 케이크를 어떻게 자르든 상관없이 진짜 공격적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완전히 반문화적인 이 책을 히브리어 정경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모든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당신의 최악의 원수에 대해 생각한 다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정말로 이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실, 그는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도 돌아보십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미워해야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이 시대에 복음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라는 거대한 알약을 삼키도록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 정말 어려운 소식이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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