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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유월절 잔

셰멘 사손의 J.E.F.


유월절 밤에는 유월절 포도주 잔을 들고 소리 높여 할렐(찬양)을 부릅니다. 다윗이 말했듯이 고대의 말씀 속에는 유월절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시 116:13)


고대 유대인 주석가들은 본문 안에서 추가적인 차원을 언급합니다. “구원의 잔”으로 번역되는 코스 예슈오트(כּוֹס־יְשׁוּעוֹת)라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쓰여 있는데, 문자적으로는 “구원들의 잔”입니다. 예슈옷(יְשׁוּעוֹת), 구원들, 여호와의 구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유월절의 네 잔에 대한 암시를 보고, 다른 이들은 두 개의 특정한 잔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는 메시야 시대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때에 곡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구원의 절기이지만, 잔의 상징을 통해 다가왔습니다. 한 작가는 심지어 잔 없이는 위로도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회복과 구속의 잔

우리가 네 개의 잔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의 측면에 대해 생각해 보는 동안, 저는 이집트에서 있었던 요셉의 잔과 메시아의 잔 사이의 놀라운 유사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둘 다 죄책을 드러내고 둘 다 구속(גאולה 게울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숨겨진 잔은 결국 야곱(이스라엘)과 칠십명을 요셉에게로 내려오게 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에게는 숨겨진 잔이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의 소지품 속에서 옮겨졌지만, 요셉이 가족을 회복하기 위한 바로 그 수단이었습니다. 잔 이야기는 유다가 곡식을 사러 다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애굽의 총리(요셉)의 강요로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왔습니다. 그 만남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식사할 잔치가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이 물건을 챙길 때 요셉의 은잔이 베냐민의 곡식 자루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창 44:1-2).


그들은 당나귀에 짐을 싣고 마을을 떠나 성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이 멀어지기 전에 그들을 따라잡으러 요셉의 종이 보내졌습니다. 형제들은 총리의 잔을 훔쳤다는 비난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 모두는 전날 밤 요셉과 함께 식사하면서 그 잔을 보았을 것입니다. 함께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요셉이 그것을 높이 들어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대담하고 이상한 선언을 합니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창 44:8-9).


그것은 충격을 줄 만큼 과장된 형벌이었기 때문에 요셉의 종에게도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자루를 뒤진 하인은 잃어버린 잔이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유월절 잔

사복음서는 모두 모두 예수님께서 유월절 밤에 자신을 유월절 잔과 동일시하셨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것이 만찬 후의 잔이라고 말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그 잔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려진 구원의 잔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잔과 더불어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요셉이 살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사용된 잔을 떠올리며, 메시아의 구원 곧 예수님께서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던 잔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셉의 형제들처럼 우리도 인간을 메시아 및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는 것이 숨겨진 구원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대대로 우리의 전통을 따라 유월절 잔을 상징적으로 들어 왔습니다.

요셉의 잔은 그가 살아 있음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죄책도 드러냈습니다. 유다는 요셉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주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유다의 극단적인 선언은 그가 벌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합리적인 정도 보다 훨씬 더 큰 형벌이 부과되었을 것입니다. 그 잔이 발견되었을 때 유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창 44:16).


어떤 불법이 드러난 것입니까? 유다가 잔을 훔쳤다고 고백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요셉을 이방인에게 팔아넘긴 것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을 말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잔은 단지 그 자신을 화해시키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 앞으로 다시 끌려오고 베냐민이 종으로 잡혀갈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기를 데려가고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해주도록 간청했습니다. 그 순간 요셉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 종들을 자리를 피하게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그 거룩한 순간에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화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지은 죄는 용서되었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유다의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여러 잔, 여러 구원

이번 유월절에 모든 손님들은 여호와의 구원(코스 예슈오트)의 잔을 그들 앞에 두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메시아의 잔에 관해 말하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유월절 세 번째 잔을 들어 자신의 피가 담긴 새 언약의 잔이라고 말씀하시며 감추어진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잔은 상징적으로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의 손에 쥐어져 왔지만, 그것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을 드러내는 숨겨진 그릇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월절 희생이었으며, 그분의 피는 속죄의 진정한 보호 덮개였습니다. 한 고대 현자가 말했듯이 지금은 구원(גאולה게울라)과 속죄(כפרה 카파라)의 시간입니다.


“너희는 나와 너희를 위하여 이 달을 정하라 내가 거기서 유월절 피를 보고 너희를 위하여 속죄(מכפר 메카페르)할 것임이라” (출애굽기 랍바 15:12).


우리가 유월절 잔을 들고 할렐로 구원의 잔을 노래할 때, 우리의 죄악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덮으시는 화해의 잔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것은 구원의 잔, 곧 유월절의 세 번째 잔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마지막 잔은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때를 위하여 남겨 두셨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 고대 작가는 코스 예슈오트를 구원의 두 잔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메시아 시대를 위한 잔이고 하나는 마지막 때의 환난을 위해 예비된 마지막 구원의 잔입니다(창세기 랍바 88:5).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환난 모두에 대해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잔이 있습니다. 베냐민의 자루 속에 숨겨져 있던 요셉의 잔처럼, 그 구원의 메시지는 언젠가 메시아와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복된 유월절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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