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밭에 계십니다: 명절을 맞이하며
- 원포이스라엘
- 9월 12일
- 4분 분량

유대인들 사이에서 엘룰월에 널리 전해지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바로 "왕이 밭에 계십니다"입니다. 이 속담은 전도서 5장 9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구절은 왕과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밭과 소출, 그리고 섬김을 의미합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앞 구절과 이어지는지 뒤 구절과 연결되는지 알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소 신비롭지만, "왕이 밭에 계십니다"라는 전통적인 속담의 핵심은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도 당신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했던 랍비들은 유대인 메시아의 핵심 부분을 놓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언적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메시아께서 참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어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전도서 5장 9절의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합니다!):

왕은 밭에 있습니다 - 전도서 5장 9절
이 구절을 영어로 번역하려는 많은 시도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English Standard Version - "그러나 이것은 모든 면에서 땅에 이익이 되나니, 왕이 경작지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 (ESV)
King James Bible - "또한 땅의 이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요, 왕 자신도 밭에서 섬김을 받느니라." (KJV).
New American Standard Bible - "결국, 밭을 경작하는 왕은 땅에 유익하느니라." (NASB).
American Standard Version - "또한 땅의 이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요, 왕도 밭에서 시중을 받느니라." (ASV).
보시다시피, 정확히 말하면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18세기 벨라루스 출신 랍비 슈네우르 잘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왕의 일반적인 자리는 수도인 왕궁입니다. 왕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궁궐 관료 체계의 적절한 절차를 거쳐 일련의 비서와 대신들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수도로 가서 왕좌의 방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문, 복도, 그리고 대기실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의 문안은 꼼꼼하게 준비되어야 하며, 왕의 면전에 들어갈 때는 복장, 말투, 그리고 매너의 엄격한 규범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왕이 성 밖 들판으로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누구든 그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왕은 미소 띤 얼굴과 환한 얼굴로 모두를 맞이합니다. 쟁기를 든 농부는 왕이 궁궐에 있을 때 궁정의 최고위 대신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왕에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랍비는 여기서 시적인 자유를 누렸을 수도 있고, 다른 영역에서 성경을 흥미롭게 우회를 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왕권과 그분께 다가가는 방법에 대한 이 랍비의 생각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영광스러운 왕
궁궐 의례 없이는 다가갈 수 없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그림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대인 왕비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을 위해 호소하기 위해 영광스러운운 페르시아 왕의 보좌에 나아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홀을 내밀지 않는 한 말입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멸망당해야 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권위와 은혜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유다 가문의 메시아와 홀을 연결하는 장면은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선지자는 온전한 영광 가운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영광스럽게 서 있다가도,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절실히 깨달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우주의 왕께 그냥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들판에 오시는" 왕은 성육신을 상징합니다.
평범한 인간의 영역으로 오시는 왕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자로 만드시는 강력한 그림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성경에서, 특히 이사야 7장에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이 계속속해서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이 약속은 이사야 7장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려는 의도는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은 서늘한 날 함께 걸으셨습니다. 한때 인류와 함께하셨던 친밀한 교제는 그분의 마음이 그토록 그리워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교제를 잃었을 때 그분은 슬퍼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죄가 처리되고 교제가 회복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심으로써 실제로 드러납니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 26:11-12)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완전하게 기능하는 죄 처리 시스템과 함께 이스라엘 진영 한가운데에서 장막을 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친밀함과 연결에 대한 그분의 열망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인 장막 그 이상의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슥 2:10-11)
단지 엘룰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걸으셨을 때, 십자가에서 우리 죄값를 치르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셨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거룩하며 의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성령은 이제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기꺼이 거하십니다. 왕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거하십니다.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를 모시는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룰월은 히브리력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대속죄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회개하는 달입니다. 매일 쇼파르를 불어 이스라엘을 깨우고, 하나님께로, 회개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용서의 축복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분은 엘룰월 동안만 우리 주변에 계신 왕은 아닙니다. 그는 24시간 내내, 영과 진리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알고, 오늘 그분과 교제하며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의 생각과 기도를 아십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기록했던 것처럼, 훨씬 더 위대한 일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지만, 언젠가 우리는 왕을 직접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언젠가 우리는 하늘에서 그분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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