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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 하쇼아: 바르샤바 게토의 메시아닉 홀로코스트 영웅들을 기억하다

“홀로코스트, 특히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업적과 증언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 그리스도인 홀로코스트의 영웅들의 어깨 위에 서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만큼 전해져야 합니다.”- 미치 글레이저 박사, <홀로코스트의 영웅들: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와 예수님>


다음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추모일을 기념하기 위한 그의 연구에서 얻은 몇 가지 주요 정보입니다.


유대력 니산월 27일에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와 영웅의 기념일"을 의미하는 "욤 하쇼아" 또는 "욤 하지카론 라쇼아 붸라그부라"를 기념합니다.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은 홀로코스트 추모일을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1월에 가졌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일에 가까운 날짜로 선택되었습니다. 게토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용감하게 봉기했고 나치에 대항하여 28일간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게토는 결국 파괴되었지만 이 사건의 영웅적 행위는 유대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유대 역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시 예수님을 믿었던 수천 명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과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용감한 이방인 신자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홀로코스트와 그 영웅들을 기억하는 이 날,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경험했던 일부 유대인 신자들을 소개합니다.

홀로코스트 당시 약 25만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그리고 수천 명이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바르샤바 게토에 갇혀 굶어 죽었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나요? 다음은 그들의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라흐미엘 프리들랜드

전직 랍비 후보생이자 메시아닉 유대인 선생이였던 라흐미엘 프리들랜드는 바르샤바 게토의 지옥을 견디고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전한 극소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 한 명입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는 믿게 된 지 2년 정도 되었습니다. 바르샤바는 점점 더 많은 폭격을 받았습니다. 식량은 부족했고 전기와 물 공급도 끊겼습니다. 저는 메시아를 믿는 몇몇 다른 젊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도시를 지키기 위해 나섰습니다. 총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육체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만에 도시는 무너졌고 승리한 독일군이 진군해 들어왔습니다. 저는 도시를 떠나 친구들과 북쪽에 있는 농장 일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 받은 증명서를 손에 들고 불타는 도시를 가로질러 나갔습니다. 도시 외곽에 도착하자 한 군인이 저를 제지했습니다. "너 유대인이야?" 그가 물었습니다. 저는 말없이 그에게 증명서를 건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래, 그래도 너는 여전히 유대인이야! ” 그는 삽으로 내 등을 내리쳐 저를 도랑에 빠뜨렸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죽은 말들의 무덤을 파는 동료 유대인들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나치의 만행을 처음으로 맛본 것이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실제로 부드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어둠 속에서 탈출하여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저의 친구들은 저를 반갑게 맞이하고 음식을 주었지만, 얼마 후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제한법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르샤바로 돌아와 보니 누이 중 한 명이 발진티푸스로 사망했고 유대인 구역 주변에 벽이 세워져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1940년 11월부터 약 50만 명의 유대인들은 음식과 위생 시설이 거의 없는 바르샤바의 담으로 둘러싸인 한 작은 지역에 비인간적으로 갖혀 있었습니다. 이듬해에 약 4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인구 밀집, 고된 노동, 굶주림,질병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길 바닥에서 기아, 탈진, 헐벗음, 심장마비 또는 전염병으로 죽는 것이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1942년에 대부분 유대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6 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게토에 남게 되었습니다. 찰스 G. 롤랜드는 그의 책에서 일련의 게토 상황을 묘사하는데 "1941년까지 게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제공된 공식 배급량은 184 칼로리였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적은 음식으로는 어떤 기간 동안도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롤랜드는 유대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몇몇 사회 복지 기관에 의한 식량 공급과 굶주린 유대인들에 의한 직접적인 식량 밀수, 식품 생산의 증가, 그리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밀수 식품 암시장에서의 구매를 통하여 그러한 상황에서도 2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프리들랜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944년 후반, 저는 공동묘지, 버려진 교회, 두려움에 떠는 친구들의 집에 숨어서 게토 밖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유대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 구역 안에는 원래 50만 바르샤바 유대인들 중 마지막 5천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는 비밀리에 게토로 들어가 아직 살아 있는 몇몇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유대인 형제들도 그 말씀을 들으며 메시야 예수님울 믿게 되었습니다.

게토에 있는 제 친구들은 제게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저를 지켜 주셨다면,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저는 그들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게토를 마지막으로 떠난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입니다. 독일인들이 유대인 지역 전체를 말살한 것은 그 직후였습니다.


루드비히 히르츠펠트 박사

히르츠펠트 박사는 20대에 믿음을 갖게 된 또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인생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지역에는 노소를 막론하고, 때로는 온 가족이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저의 학생들이 있었고, 저는 종종 대부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침례를 받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침례를 받는 것으로 받는 혜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변화는 그들의 법적 지위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종교에 매료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다고 느끼는 민족의 종교에 이끌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증오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어도 증오가 있어서는 안 되는 종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편적인 반감의 분위기에 매우 지쳐있습니다.”

히르츠펠트는 바르샤바 게토의 끔찍한 상황에서도 드러났던 믿음의 영웅들의 비범한 승리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은혜입니다. 그리보스키 광장과 트와르다 거리가 사라집니다. 흥분하고 열광하는 가난한 군중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예배 장소의 차가움과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고 있습니다.”


우리 무리 중에 깊이 기도에 빠져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살인자들와 증오자들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넋을 잃은 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더 높은 교감의 정서로 하나가 됩니다…

“...내가 왜 그 괴물 같은 남자들을 사랑해야 하나요? 아무 이유 없습니다. 사랑은 영적인 상태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때로는 흐릿하고 희미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대한 요구 만큼이나 삶의 기쁨 만큼이나 본능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별이 총총한 가운데의 몰입과 춤추는 별들의 환희를 전하는 만큼이나 기쁨입니다. 여기에는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영혼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천상의 음악이 들립니다. 그리고 이 조화 속에서 영혼은 굴욕감에 흐느끼며 몸을 굽힙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황홀하게 감싸안고 망각 속에 떠 있습니다. 끔찍한 사람들, 끔찍한 것들이 사라집니다: 모두 위대한 조화에 반향을 일으킵니다."


어두운 곳에서의 위대한 빛

그 당시 그렇게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동유럽에서 복음으로 유대인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크게 늘었습니다. 글레이져는 "바르샤바는 실제로 유대 그리스도인 활동의 온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쯔학 쥬커만과 모쉐 바쇼크가 저술한 역사서 "게토 전쟁에 관한 책”은 바르샤바 게토에 실제로 예수님을 믿었던 많은 유대인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몇몇 증언은 그들을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하는데 어느 시점에서는 "거의 모두가 지성인이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비록 한나 크롤은 신자는 아니지만 그녀의 폴란드 단편 소설 “구원”에서 다음과 같이 예화를 듭니다.


“독일군이 모든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몰아냈을 때 교회에는 단 한 명의 유대인만 남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성화에 있는) 어머니를 부르셨습니다: “Mame, kim…” 이말 은 이디쉬어로 '엄마 오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내려와서) 움슐라그플라츠(역자주: 게토에서 나치 죽음의 수용소로 가기 전에 하루 밤 지내던 철도역 인근 수용구역)로 갔습니다.”


크롤은 이것을 게토에서 전해지는 가슴 아픈 수많은 유대인-기독교 일화 중 하나로 설명합니다.


라흐미엘 프리들랜드의 강력한 언어로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제 참혹한 경험을 통해 저는 메시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지상에 지옥을 가져올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인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고 지탱해 준 성경은 평화의 왕이 오셔야만 평화와 정의가 이 땅에 가득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분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그분이 크신 사랑과 기적적 능력을 제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분이 오실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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